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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한국교회의 종교개혁

Jackim 2012. 5. 5. 18:59

 

[네티즌을 위한 알기 쉬운 기독교] (8)한국교회의 종교개혁

[국민일보] 2011-10-28 37면 07판 문화 기획,연재 2729자

■ 요즘 한국 개신교의 신뢰도가 계속 하락하고 있는데, 한국 교회에 필요한 개혁의 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면 신앙생활에서 행함과 실천은 필요 없다는 뜻입니까?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라는 독일의 젊은 사제가 비텐베르크 대학교회 정문에 개혁이 필요한 95개조 항목을 대자보로 게시했는데 그 95개 항목의 핵심은 당시 가톨릭교회에 만연했던 공로신앙, 특히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당시 많은 사람의 마음 깊이 잠재해 있던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선봉에 섰던 루터는 1520년 ‘기독교인의 자유에 관하여(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라는 글에서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면서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계명과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고 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분명하게 “율법과 선행은 ‘의롭게 됨(義認)’과 구원에 불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주장은 당시 교회에 팽배했던 공로주의 신앙에 대한 반성의 차원도 있었지만 한편 이러한 주장을 듣고 당시 사람들 중에는 구원을 얻기 위해 선행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한 루터는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같은 해 ‘선행에 관하여(Von den guten Werken)’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이 글에서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이 결코 행함이나 선행을 배제하려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앞의 글에서 “의롭게 되고 구원을 얻기 위해 율법과 계명은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한 루터가 “선행을 해야 한다.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 것은 분명한 모순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것을 모순으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선행과 계명을 지키는 것이 구원의 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루터는 계명을 지키는 등 선행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그에게 있어서 이런 선행이 곧 구원의 조건은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선행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지만 자신의 ‘오직 믿음으로’라는 신학 논리에 갇혀 결국 개신교인의 삶에서 선행과 행함을 이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종교개혁
지금 한국 개신교회는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이 도덕성 면에서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민족을 각성시켜 현대문명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고 교육사업, 의료사업, 사회봉사, 독립운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남북통일운동 등을 통해 사회와 역사를 선도해 왔던 자랑스러운 한국 개신교가 지금은 사회인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개혁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잘못된 신학이 근본 원인 중 하나일 것입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오랫동안 루터가 주장한 ‘오직 믿음으로(Sola fidei)’의 신학에 익숙해진 결과 삶 속에서 선한 열매를 맺는 일을 소홀히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을 보면 루터의 Sola fidei 신학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영생(구원)의 조건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마19:16∼19).

또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믿음)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행함)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점은 바울사도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로마서의 큰 주제는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지만,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와는 차원이 다르며 모든 바울서신에서는 한결같이 사랑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롬13:10)이며 육체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갈 5:19-21, 엡 5:5)고 했습니다. 나아가 야고보 사도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약2:26)”이라고 실천적인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말씀에 비춰볼 때 루터의 sola fidei 신학은 진리의 절반만 말했을 뿐이며, 나머지 절반인 행함이 보충돼야 완전한 진리가 될 수 있습니다. 500년 전 당시 상황에서는 루터의 sola fidei 신학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루터 신학의 재해석이 필요합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루터의 sola fidei 신학을 절대화하고 행함을 강조하신 예수님 말씀을 이차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루터를 우상화하는 일이며, 그렇게 되는 것을 루터도 결코 원치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루터의 sola fidei 신학은 ‘fidei cum opera(행함을 동반한 믿음)’의 신학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루터는 분명히 16세기에 필요한 신학을 훌륭히 수행한 선구자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필요한 제2의 종교개혁 신학은 ‘믿음으로만’이 아니라 ‘믿음과 행함을 겸비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신학입니다. 개신교회가 500여년 전 개혁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개신교회의 본질을 상실한 것입니다. 바람이 움직이기를 멈추는 순간 더 이상 바람이 아니듯 개신교회가 갱신의 몸부림을 멈출 때 더 이상 개신교회가 아닙니다. 개신교회의 본질은 ‘항상 개혁하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이기 때문입니다.

강영선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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