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하며]/경영리즘들

이건희 회장을 생각하며

Jackim 2008. 5. 12. 09:25


이건희 회장을 생각하며
 

이건희 회장. 그 분은 나를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매우 중요한 시기에 
비교적 지근거리에서 그 분을 모신 경험이 있다. 
나에게 각인된 그 분의 특징은 어눌한 말투, 기인적 면모, 청순하면서도 
사유 깊어 보이는 눈, 이 3가지다. 
그 중에서도 잊지 못하는 것은 소위 삼성그룹 내에서 '회장 어록'으로 불린 
취임 초기의 각종 지시와 대화록이다.
더듬거리는 말투로 장시간 쏟아내는 숱한 이야기를 당시 나는 -아마도 
대부분이 그랬겠지만-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두세 시간을 들어도 딱히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애매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취임 초기 그룹 총수에게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설득력 있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고 생각한 나에게는 매우 실망스런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직장생활의 연륜이 쌓이고 직위가 올라가면서 또 
사회가 급변하면서 예전에는 그렇게 들어도 이해되지 않던 얘기들이 거의 
예언처럼 들어맞는 것을 보고 나는 어느덧 이 회장을 우리 시대의 대표적 
현인(賢人)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번 말문을 열면 10시간, 20시간도 계속된 당시의 선문답 같은 얘기들을, 
듣는 사람은 지루하기 그지 없었겠지만 그 분은 어쩌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을 것이라는 만각(晩覺)이 든다.
일례로 92~93년에 강조한 말은 '디자인 경영'이었다. 머지않아 디자인이 기업 
경영의 핵심이 될 것이므로 각사는 디자인 감각을 키우고 관련 인력을 적극 
양성하며 세계적 디자이너와 교류 등에 힘쓰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다수가 고개를 끄덕일 얘기지만 15년 전에 들은 우리는 당최 무슨 
얘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일본의 비단잉어 키우는 과정을 담은 비디오테이프가 한동안 그룹의 교육재료로
쓰인 적이 있다. 지극정성을 들여 키운 비단잉어 1마리가 때로는 수백만원을 
호가하기도 했는데, 그 당시는 '세상에 별 사람들이 다 있구나' 하는 정도였지 
그것이 오늘날 우리 농촌의 고부가 사업의 전형을 제시한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이밖에도 그의 선견(先見)과 예지(叡智)를 엿보게 하는 사례는 
책 1권으로 엮기에도 부족할 정도다.
나는 이따금 생각해 본다. 그 분은 10여년 전부터 내다본 것을 나는 왜 이제야 
이해가 될까 하고. 사실은 해답도 분명하다. 그것은 IQ 차이가 아니고 그 양반 
특유의 깊은 사유(思惟)의 결과라는 것을.
내가 삼성을 떠난 이후 이 회장이 어떤 변화를 보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회장이 신경영을 부르짖은 이후 15년 사이에 삼성의 매출은 10배, 
이익은 60배 이상 신장했고 세계 500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꿈만 같던 시절로
부터 불과 10여년 만에 세계 50대기업을 일궜다.
뉴욕도 아닌 뉴저지의 이름없는 할인점 한구석에 먼지만 잔뜩 쌓인 채 놓여있던
삼성 TV를 일본을 제치고 세계 정상에 우뚝서게 한 것은 한국 근대사에 길이 
남을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싶다.
영웅은 오직 시대 정신의 산물이라는 말도 있고 또 그 분 역시 법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도 알지만 올해 우리 경제가 순탄치 않다는 보도를 접할 
때마다 그 분의 조기퇴진이 왠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피터 드러커 교수가 꼽은 21세기 최대 변화가 '한국의 경제발전'이라고 하던데,
우리의 현대경제사는 언제까지 무명용사의 묘(墓)로만 채워나갈 것인지.
박종인 한국전자금융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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