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블랑카 (1942)
● 두 번째 헤어짐을 두고 남자는 "우리 둘을 위한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이건 '최선의 선택'도 '최악을 피한 선택'도 아니다. 다만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이었을 뿐.
# 냉소주의자, 흔들리다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었다니 한 때 누구보다 뜨거웠을 사내 릭(험프리 보가트)
은 이제 냉혈한처럼 보인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미래를 궁금해 하지 않으며,
전쟁의 광기로부터 자신의 카페를 지키는 것만이 삶의 모든 것인 남자.
하지만 프랑스 경찰국장 르노(클로드 레인스)가 족집게처럼 집어낸 것처럼
"타고난 감상주의자"를 봉인했던 "냉소적 껍질"에 균열이 인다. 독일군의
파리 입성 전날, 함께 떠나자던 오후 5시발 열차에 오르지 않았던 여자 일자
(잉그리드 버그만). 그녀가 "온 세상 모든 술집 중에서" 하필이면, 어쩌자고
그의 술집으로 들어선 것이다. 게쉬타포 감시를 받는 유명 레지스탕스 지도자
인 남편 빅터 라즐로(폴 헨레이드)와 함께.
차라리 유령과의 재회였으면 좋았을 이 순간으로 인해 봉인됐던 모든 것들은
풀려나고 시간은 걷잡을 수 없이 뒷걸음질 친다. 릭의 카페에 다시 흐르는
"As Time Goes By"를 따라, 와인 잔 부딪치며 속삭이던 파리에서의 밀어가,
그 때의 간절함과 행복감이 생생히 되살아나는 것이다. 배신의 고통이 깊었던
남자는 냉정히 외면하고 싸늘히 경멸하며 끓는 분노를 퍼붓기도 하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그에게 그녀는 운명이 점지해준 세상의 단 한 사람, 단 한 명의
여자였으니.
● 저 비행기에 올라탔어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바랄 수 있을까…. 구깃구깃한 트렌치코트 자락에 가려진 남자의 깊은 속은
가늠할 수가 없다.
# 선택, 또 다른 이별
전쟁을 탓한들 무엇 하리. 자신을 "지식과 생각의 세계로 이끌었기"에 존경하며
사랑했던 남자 빅터와, 이 세상에 단 한 명의 남자였던 릭을 오가며 결국 둘
모두를 기만하게 된 얄궂은 운명을 탓할까. 그렁거리는 눈망울에 회한과 죄책감,
여전한 사랑을 담아 싸늘한 릭을 바라보는 일자를 기다리는 건 그러나 단 하나,
더 나쁜 선택뿐이다.
그러니 환영도 유령도 아닌 살아있는 그녀를 카페에서 처음 발견한 샘의 말은
진실이었다. "당신은 그에게 불행을 줘요." 차라리 사랑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영원히 증오의 대상으로 봉인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릭의 카페 대신 그
옆의 '블루 패롯'에만 들렀어도, 혹은 죽어가던 유카타가 릭에게 자유통행증을
넘겨주지만 않았어도 이런 파국은 피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 모든 가정은 부질없다. 세상이라는 사막 속에 릭이 일구었던 작은
오아시스, '카페 아메리칸'은 이미 바람 앞의 등불과 같다. "이 미쳐버린 세상
에서 세 사람이 함께 행복해지길 바랄 수는 없기"에, 함께 떠나는 이들의 뒷모
습을 보며 누군가는 표표히 발걸음을 돌려야만 하는 것이다.
"이유는 묻지 말고 내 사랑만을 믿어줘요.""다신 당신을 떠날 수 없어요."-두
개의 사랑을 위해 두 개의 진심 혹은 거짓을 속삭이는 일자와 자신을 위해, 그
리고 오랫동안 외면했던 내면의 명령을 좇아 헌신하고 싶은 빅터의 이상을 위해,
릭은 안개 낀 공항에 홀로 남는다. "저 비행기를 떠나보내면 후회할거야. 오늘
이나 내일은 아니라도 곧 평생 후회하겠지." 일자를 떠나보내며 했던 그의 말은
정작 자신에게 던지는 확신에 찬 예언처럼 들린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하나의 선택만이 남을 뿐이다. 운명으로 얽힌 릭과 일자,
빅터의 3각 관계를 정리한 그의 언해피엔딩이, 그의 말처럼 르노와의 새로운
우정의 출발이 되었기를. 더 이상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지 않고 사막을 옥토로
바꾸는 삶을 그가 살게 되었기를 바랄 밖에.
박인영 / 영화 칼럼니스트
# 이 영화는
■ 우연이 만든 걸작=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은 고립주의 노선을 폐기한다.
참전 선언 다음날 시나리오가 나온 '카사블랑카'는 대타들의 행진으로 완성됐다.
군 입대한 윌리엄 와일러 대신 마이클 커티즈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로널드 레이건
이 험프리 보가트(43세)로 바뀌었다. 미셸 모르강이 당시만 해도 풋내기였던
잉그리드 버그만(27세)으로 대체됐으며 샘 역의 엘라 피츠제랄드가 스케줄 때문에
빠지자 피아노도 못 치는 둘리 윌슨이 캐스팅됐다.
시나리오, 세트도 완성되지 않은 채 촬영에 돌입했다던가, 엉성한 세트를 가리기
위해 안개라곤 끼지 않는 카사블랑카 공항에 안개 자욱한 설정을 해서 눈물의
이별 장면을 만들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은 이제 전설이 됐다. 시나리오 작가
7명의 우왕좌왕에 질린 험프리 보가트가 적잖은 대사를 즉흥적으로 처리했다거나,
촬영 마지막까지 누구를 따라가야 할지 잉그리드 버그만도 몰랐다는 뒷이야기들도
'Oldies But Goodies'의 광채를 더한다.
■ 'As Time Goes By'…"Play it, Sam"=지나간 날의 불같은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매력을 추억하는 1931년 허먼 헵펠드의 곡 'As Time Goes By'를 빼놓고 '카사블랑카'
를 기억하는 건 불가능하다. 샘에게 평생의 금지곡이었던 봉인을 풀어버린 잉그리드
버그만의 그것, "Play it, Sam" 또한 많은 골수팬들이 아끼는 대사가 됐다.
■ 말, 말, 말=신비한 독설가 릭이 던지는 한마디는 고스란히 명화의 전당에 기록될
명대사였다. "어젯밤 어디 갔었죠?"/"오래된 일은 기억 못 해", "오늘 밤 올 건가요?"/
"먼 계획은 세우지 않지." 간절한 여성의 시선을 냉혹하게 외면하던 그도 추억의 노래
를 청하며 고통스런 탄식을 내뱉는다. "그녀가 견디면 나도 견뎌…."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를 Here's looking at you, kid", 밀어를 속삭이던 로맨티스트로 다시 돌아온 그는
안개 속으로 사라지며 이렇게 말한다. "루이, 이것이 멋진 우정의 시작일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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