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기독교인은 왜 술 담배를 하면 안되는가?
[네티즌을 위한 알기 쉬운 기독교]
(41)기독교인은 왜 술 담배를 하면 안되는가?
[국민일보] 2012-06-22 29면 09판 문화 기획,연재 2874자
■ 술 담배가 죄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기독교인은 왜 술과 담배를 하면 안되는 거지요?
■ 가톨릭 신부님들은 술 담배에 구애받지 않는데 목사님들은 왜 술 담배를 안합니까?
■ 교인들은 일상적으로 술을 마시면서 교회에서는 안마시는 척 하는 것은 위선적 이중생활이 아닙니까?
예수님 시대 담배 있었다면 금하셨을 것
한국교회 금주·금연 운동 사회에 큰 공헌
우선 전제할 것은 성서에는 담배에 관한 언급이 없습니다. 당시에는 담배라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만약 예수님 당시에 담배가 있었다면 예수님은 틀림없이 담배를 금하셨을 것입니다. 담배는 피우는 사람의 건강뿐만 아니라, 옆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주니까요. 그런 백해무익(百害無益)한 것을 예수님이 권장하셨을 리 만무하고, 틀림없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십니다. 그 거룩한 몸을 니코틴으로 파괴하지 않도록 하시오.”(참고/고전 3:16∼17)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술에 관해서는 성서에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술은 주로 포도주였는데, 당시에는 포도주가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음식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포도주도 과하게 마실 경우, 노아가 술에 취해 자식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이야기처럼(창 9장), 실수와 방탕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엡 5:18)라고 경고했으며,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는 감독과 집사의 자격을 말할 때 “술을 즐기지 않는 자” 또는 “술에 탐닉하지 않는 자”라고 규정했습니다(딤전 3:3, 8).
그리고 성서에는 일반 포도주 정도로 취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강한 술을 마셨던지, 독주에 대한 언급도 나옵니다(레 10:9, 사 28:7, 미 2:11 등 참고). 그리고 그 옛날에도 술자리를 2차, 3차로 옮겨 다니며 마셔대는 사람들이 있었던지, “늦게까지 술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잠 23:30)에 대한 언급도 나옵니다. 당시에도 우리나라 폭탄주 같은 술이 있었던지 “혼합주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잠 23:30)에 대한 언급도 나옵니다.
이러한 성서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술에 대해서는 긍정적 발언보다는 부정적 발언들이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주신 기적의 사건(요 2장)은 잔치에서 필수요소인 포도주가 동났을 때, 잔치를 잔치되게 하신 예수님의 배려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물만 마시지 말고 위장과 잦은 병을 생각해서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고 권면했습니다.
또 구약 아가서에서는 남녀간의 달콤한 사랑을 포도주에 비유한 표현들이 나옵니다(아 1:2, 7:9). 이러한 긍정적인 보도도 있지만 부정적인 보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포도주는 사람을 거만하게 만들고 사람을 소란스럽게 만든다”(잠 20:1), “그들의 포도주는 뱀의 독이요, 독사의 맹독이다”(신 32:33), “음행의 포도주”(계 17:2) 등등.
이처럼 술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술취함으로 인해 파생되는 여러 가지 실수와 방탕과 범죄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기록되던 당시대와 오늘 우리 한국사회와의 시간적·공간적·문화적 차이로 인해 오늘날의 술 문제에 관한 절대적 기준을 성서에서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궁극적 진리의 문제가 아닌 한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사회윤리적 차원에서 풀어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윤리적 기준은 약한 이웃에 있다
저는 술 담배를 비롯해서 종교나 교단에 따라 금기시하는 제반 음식문제에 대해 우리가 성서에서 배워야할 윤리적 기준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울사도의 가르침입니다. 바울사도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서 이런 대답을 줍니다. “나는 그 고기를 먹는 것이 신앙적으로나 양심적으로 전혀 문제될 것이 없지만, 내가 그 고기를 먹는 것이 믿음이 약한 사람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나는 평생 그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전 8장). 즉 건강한 사람의 자유가 약한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바울사도는 음식문제로 형제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권면합니다(롬 14:13∼15). 이러한 바울사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믿음(신앙수준, 의식, 지적수준 등)이 강한 사람이 믿음이 약한 형제를 위해 어떤 음식을 삼가한다면 그것은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사도의 가르침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술 문제에 대한 사회윤리적 기준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처신이 비신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금주금연은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
술과 담배 문제에 관해 생각해야할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술과 담배를 금한 것은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이라는 점입니다. 금주금연운동은 초창기 선교사들에 의해 촉발되었고, 교회 내부뿐 아니라 1910년대 국채보상운동과 함께 YWCA, 기독교절제회 같은 기독교 단체들이 한국사회의 절제운동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따라서 금주금연운동은 한국사회 전반에 상당히 긍정적 공헌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처럼 금주금연은 한국교회가 지켜온 아름다운 전통과 윤리의 문제입니다. 기독교의 신앙전통 속에는 ‘금욕과 절제’가 있는데, 그런 면에서도 금주금연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의 음주율과 청소년 흡연율이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는 실정에서, 또한 주폭(酒暴)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어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다시한번 각성하여 금주금연을 실천하고,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지키고 보존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강영선 한신대 교수
저작권자 ⓒ국민일보.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