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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기독교의 태동과 전파에 관하여

Jackim 2012. 5. 5. 18:53

 

[네티즌을 위한 알기 쉬운 기독교] (7)기독교의 태동과 전파에 관하여

[국민일보] 2011-10-21 33면 07판 문화 기획,연재 2738자

■ 기독교는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 기독교의 시조가 예수님이 아니고 바울이라고 들은 적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한 배경은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뿌리: 야훼종교와 유대교
기독교는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이스라엘 땅에 사셨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전의 종교, 즉 구약시대의 야훼종교와 주전 587년 이후 새롭게 형성된 유대교는 기독교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뿌리와 줄기가 됩니다.

야훼종교는 주전 25세기께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에 의해 시작되었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형성된 이스라엘의 민족종교입니다. 야훼종교는 주전 13세기에 있었던 모세의 등장과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Exodus), 40년에 걸친 광야생활, 가나안 정착과 사사시대를 거치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로서 그 정체성을 단단히 다져갑니다. 그러나 왕정시대에 들어서 나라가 부강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면서 야훼종교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꾸짖고,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의 불의를 질타하며 야훼신앙의 지조를 지키라고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죽음을 계기로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주전 926년). 북 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에 앗시리아라는 강대국에 멸망당했고, 남 왕국 유다는 주전 587년에 바빌로니아 제국에 멸망당합니다.

그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야훼신앙에 철저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죄과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신앙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유대교(猶太敎)의 출발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유대교는 변형된 야훼종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전은 회당으로 바뀌었고, 제사장 대신 랍비가 생겼고, 제사 대신 예배와 교육이 자리 잡았습니다.

기독교의 시작과 전파
오늘날 기독교의 중요한 하드웨어(형태)와 소프트웨어(내용)가 유대교로부터 전승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유대교와의 결정적인 차이, 즉 나사렛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복음을 전파하면서 기독교는 이스라엘 민족종교의 울타리를 벗어나 세계종교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민초들과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르쳤고, 그에게서 새 시대의 희망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를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믿고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만에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하고 말았지만 그렇게 돌아가신 예수가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그리스도)였음을 믿는 신앙, 돌아가신 예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음을 믿는 부활 신앙,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제자들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화됩니다.

기독교 복음전파와 교회설립과 선교사역에 있어 바울이라는 사도의 공로와 업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선교사였고, 소아시아 여러 지역에 수많은 교회들을 설립하고 교인들을 돌본 최초의 목회자였습니다. 바울 사도에 의해 기독교 복음이 소아시아 지역부터 유럽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즉 온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초석을 놓으신 분이 바울 사도이십니다. 나아가서 바울 사도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체계를 수립하고, 기독교 신학의 기틀을 마련한 최초의 신학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바울 사도의 탁월한 공로 때문에 바울 사도를 기독교의 시조라고 보는 견해가 생긴 것 같지만 오해가 없기를 바랍니다. 물론 예수님이 직접 교회를 세우시거나 기독교라는 교단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님이 그 씨앗을 뿌리셨고, 그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었던 직계 제자들과 성도들에 의해 뿌리가 생겼습니다. 바울과 같은 사도들과 교부(敎父)들에 의해 줄기가 자라고 열매가 맺힌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 사도의 탁월한 업적과 공로는 아무리 과장해도 모자람이 없겠지만 결코 바울 사도가 기독교의 시조는 아닙니다.

1세기 당시 로마제국은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황제를 신격화하여 숭배하게 했는데, 그것은 곧 사상통제의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황제숭배를 거절했고 그 이유로 엄청난 박해를 받았으며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습니다. 쿼바디스, 벤허 등의 소설과 영화는 그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 박해의 와중에서도 기독교는 교세가 확장되면서 로마제국의 외곽지대까지 퍼져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公認)된 후에는 더욱 급속도로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습니다. 그 결과 4세기에 이미 신자 수가 3000만명으로 증가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초기 지중해 연안의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기독교는 유럽 땅까지 전파되었으며 불과 500∼600년 만에 오늘날의 서유럽, 북유럽, 동유럽이 기독교 세계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급속한 전파력은 성서적으로 해석하자면 성령의 역사이겠지만 객관적 조건으로 보자면 당시 로마제국의 안정된 치안, 발달된 교통망과 통신체계, 통일된 언어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공로를 결코 간과할 수 없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의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충분히 했습니다. 한편에는 그가 로마제국의 체제를 유지하는 하나의 지주로서 교회를 활용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 기독교가 급속도로 발전한 근본 원인은 로마가 통치하던 당시 세계의 정신적 피폐와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기독교가 새로운 희망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강영선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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