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하며]/생각하는글

[영화]기쁜 우리 젊은 날(1987)

Jackim 2008. 6. 1. 21:10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1987)
 "남자의 순애보는 가이없어라"
#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
무대 위에서나 사소한 일상의 풍경 어디에서도 그녀는 환히 빛난다. 
발광체 같은 그녀가 스크린을 가득 채울 때, 그 어느 한 구석에 그 
또한 늘 있었지만 주목하기가 쉽지 않다. 꽃다발 품에 안고 극장 맨 
앞줄에 앉았을 때도, 버스 정류장과 길거리에서 그녀 주변을 서성일 
때도 초점이 맞지 않은 모호한 존재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브로드웨이를 동경하는 대학 연극반원 혜린(황신혜)과 희곡을 쓰는 
상대생 영민(안성기)의 관계는 그렇게 불평등하다. 찬란히 빛나는 
히로인과, 그녀를 앙망하는 덜 떨어진 숭배자의 구도.
▲ 바다와 남자, 그리고 여자. 손안에 가득 담기는 여자의 작은 
어깨를 보듬는 것, 남자의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아련하게 들으며 
그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것. 이 세상에서 단 하나 원했던 것이 이루어
졌음에 감사하는 남녀의 바닷가 풍경은 한없이 평화롭다. 짧기에 더욱 
달콤할 평화와 행복의 시간. 배창호 감독의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이 구도는 2대째 내려오는 집안내력이 된다. 아버지(최불암)는 소학교도 
못 나온 장사꾼 처지에 언감생심 대학 나온 인텔리를 넘봤었다. 
그 피를 내리물림 했으되 절반만 물려받았는지, 아들의 행동거지는 영 
마땅치 못하다. 헛기침, 헛발질에 말 더듬기는 기본. 물 컵을 쏟고 맥주를 
흘리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부산을 떤다. 
그러나 번쩍이는 다이아반지 광채 앞에서 스파게티 면발과 소스를 묻힌 채 
허둥댔던 처량한 몰골의 패자는 기어코 당당한 사랑의 승리자가 된다. 
'항상 그대가 앉아있는 배경에서/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황동규 '즐거운 편지') 혜린을 부르고 
또 불렀을 때, 비로소 답장이 도착하는 것이다. 
# 신파는 정말 힘이 세다
미국 브로드웨이 무대를 동경했던 혜린은 연극 리허설 도중 "1950년대식 
싸구려 신파극이라 못하겠다"며 무대를 박차고 나왔었다. 그런데 미래의 
혜린 남편-영민의 연적(전무송)이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갈등 국면으로 
진입하는 이 장면은 영화 '기쁜 우리 젊은 날'에 대한 일종의 자기반영적 
발언으로 읽히기도 한다. 
어차피 신파이기는 한데, '1980년대식 고급 신파극'을 한 번 해보겠다는 
당찬 선언처럼 들리는 것이다. 그리고, 과연 이 선언대로 영화는 '천생 신파'의 
지점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눈물 콧물 짜내던 종전 신파극의 구태의연함을 
벗어버림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동반하기는 했어도 신파는 역시 신파. 이보다 더 
신파적일 수 없는 온갖 이야기들의 종합선물세트라 할 만하다.
오로지 여자를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삶의 기획도 없는 것 
같은 순정남은 결국 선녀의 날개옷을 훔친 나무꾼이 된다. 신파의 싸구려다움을 
경멸하며 햄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하던 여자는 '김중배의 다이아에 현혹된 
이순애'의 인생유전을 겪고 남자의 사랑으로 구원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검은 머리 파뿌리'의 일심동체 맹세가 운명적으로 좌초됨으로써 이 
신파극은 기-승-전-결의 구조를 온전히 충족시킨다. 엄마를 꼭 빼닮은 어린 딸의 
에필로그까지 덧붙여서.
그러니 아무리 '1950년대식'은 아니라고 해도, "제가 그렇게 좋으세요?"/
"네"/"어디가 그렇게 좋으세요?"/"전부 다요"식의 대사를 2008년에 들으면서 
끝까지 진지하기란 쉽지 않다. "혜, 혜린씨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결혼하고 
싶습니다. 행복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식의 뭉툭한 프로포즈 또한 얼굴 절반을 
덮는 안경테만큼이나 철저히 지난 시절의 것이다. 그런데도, '영혼과도 같은, 
영원한 사랑'을 회의 없이 확신하는 '1980년대식' 낭만 앞에 자꾸만 무기력해지는 
건 왜일까. 이 쯤 되면 무지무지하게 막강한 신파의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박인영·영화 칼럼니스트
# 이 영화는
■ 배창호 = 2007년 열린 제1회 서울국제영화제는 배창호와 '기쁜 우리 젊은 날'을 
망각 저편에서 불러 다시 세상에 내세웠다. 그의 이름을 너무도 많은 이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외면하고 있었다는 씁쓸한 자각과 함께. "1980년대는 배창호의 
시대였다"라거나 '배창호 세대'라는 말을 가능케 했던 그는 "사람들이 잃어가고 
있는 사랑의 마음을 영화를 통해 조금이라도 일깨워주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걸 갖고 있다"고 말한다. 뼛속 깊이 로맨티스트인 그의 모든 작품을 상영하는
 '배창호 특별전'이 지난 20일부터 6월1일까지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열리고 있다. 
창창한 미래를 앞둔 현재진행형의 감독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회고전'이 아닌 
'특별전'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 1987년 = 1987년산(産) '기쁜 우리 젊은 날'은 두 개의 단절을 품고 있다. 
당대의 멜로드라마 혹은 성애/에로영화들로부터 영화는 멀찌감치 거리를 둔다. 
눈물과 시련으로 점철된 과잉 감정의 강요도 없으며, 왜곡된 남성 중심적 성적 
판타지와 관음증을 충족시키지도 않는다. 일련의 통속적이고 전형적인 것들을 
새로운 감각으로 차별화하는 것, 그것이 '기쁜 우리 젊은 날'의 
첫 번째 좌표였다면 두 번째 단절은 당대의 시대적/현실적 맥락으로부터 온다. 
매일같이 '짱돌'과 최루탄이 날던 불온한 변혁의 시간, 젊은이들의 감성을 억압하던 
엄혹한 현실은 '기쁜 우리 젊은 날'에 없다. 순도 100% 낭만주의라는 장르 영화적 
쾌락은 이러한 두 개의 단절을 바탕으로 가능했다.
■ 스타일 = 이야기의 고루함과 달리 영화의 스타일적 성취는 자못 혁신적이다. 
종전 충무로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핸드 헬드(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움직이며 
찍는 것)나 롱 테이크(한 장면을 오랜 시간 찍는 것) 촬영, 유리잔과 안경 등을 
활용한 시점 쇼트, 토셀리의 세레나데 변주곡의 사용, 단아한 절제미 등은 21세기 
관객들의 눈높이도 충족시킬 만한 것이다. 시나리오를 함께 썼던 이명세조감독의 
흔적과 기여도도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