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하며]/생각하는글

[영화] 러브 스토리(1970)

Jackim 2008. 5. 30. 12:17


[영화] 러브 스토리(1970)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 20년 만에 뉴욕이 하얗게 변했던 겨울. 큰 대자로 벌러덩 누워보고, 
풀썩 앞으로 고꾸라지며 살아있음의 희열을 만끽한다. 
이제야 만났으니 앞으로 주어질 길고 길 시간 내내 이렇게 행복하자고 굳게 
다짐하며. "세상이 우리에게 어떤 험난한 고통을 주더라도 만족하며 살아가리라…." 
# '애송이'와 '겁쟁이'
"(자신이)왜 그리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당신과 커피 안 마실 테니까."/
"마시자고 할 생각도 없어."/"그러니까 멍청하다는 거지." 역시, 
남자는 '멍청한 부자'가 틀림없는 것 같다. 커다란 뿔테 안경에 턱을 약간 쳐들고 
당돌하게 말하는 래드클리프 여학생과의 첫 만남에서 보기 좋게 한 방 먹었으니.
 '애송이'라는 별명에 억울해할 일은 아닌 것이다.
에릭 시걸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아서 힐러 감독의 '러브 스토리'에서 
올리버(라이언 오닐)는 머리 깨나 좋은 수재지만 번번이 치고 빠지는 
제니(알리 맥그로우)의 언변 앞에서 맥을 못 춘다. 남자는 무조건 기죽이고 보는 
래드클리프 최고의 깍쟁이에게 대적하기에 그는 아직 '애송이'인 것이다. 
하지만 '똑똑하고 가난한' 빵집 딸 제니도 알고 보면 오십 보 백 보다. 
하버드 강당과 같은 성(배럿)을 가진 남자와의 관계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안전한 
유리벽 안에 들어앉아 있었던 것. 다혈질 하키선수다운 올리버의 정공법에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선물로 가득 찬 산타의 가방 같은 하버드'를 떠날 시간이 
다가오자 파리 유학을 결정한다. '백만장자와 무일푼의 축제'는 끝나고 마차가 호박으로 
변하는 시간. 이제 그만 각자의 자리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올리버 배럿 3세의 이름이 약속하는 어마어마한 부와 편안함의 유혹을 외면한 남자와, 
기회 있을 때 도망가기 보다는 맞서 부딪치기로 결심한 여자는 
엘리자베스 바렛 브라우닝과 월트 휘트먼의 시를 주고받으며 함께 함을 서약한다. 
그런데 간결하나 한없이 낭만적인 둘의 결혼식 장면은 '러브 스토리'에 
'최루성 멜로 영화'를 넘어선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아버지와의 냉랭한 갈등 끝에 결국 아버지의 아들임을 거부한 올리버와 달리 
다정다감한 부녀관계를 유지하던 제니는 결혼식을 종교의식으로 치르라는 아버지 
의견에 거부의사를 밝힌다. 누구의 이름도 빌리지 않고 서로서로의 이름으로 식을 
주관하겠다는 것. 그리고 끝내 서운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말한다.
 "세상이 변했어요, 아버지(It's a new world)."
그렇게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거부한 두 남녀는 온전한 자신들만의 힘으로 세상과의 
싸움에 나선다. 고단한 노동과 빠듯한 시간의 시련 앞에서도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하는 
학문적 열정을 불태우거나, 그토록 사랑했던 모차르트와 바하, 비틀즈를 잠시 잊은 채 
연봉 3천5백 달러의 일상에 전력투구한다. 아버지와 기성세대의 이름을 거부한 
'독립선언'의 반대급부였던 '길고도 험난한 길'을 서로의 어깨를 의지하며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다.
물론 이 여정은, 세상의 모든 행운을 거머쥔 것 같은 순간, 느닷없이 중단된다. 
"세상이 우리에게 어떤 험난한 고통을 주더라도 만족하며 살아갈 시간은 
얼마 되지 않으리"라던 시의 구절이 서늘한 예언이 되고,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며 소중히 여기겠다"던 맹세가 에누리 없이 충족되는 순간을 너무나 
빨리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둘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 용감함을 잃지 않는다. 센트럴파크에서의 눈싸움도, 
아이스링크에서의 즐거웠던 시간도 다시 기약할 수 없는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니, 
죄지은 표정을 짓지도 말고 '미안하다' 말하지도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건 
'사랑'이라는 이름의 여행을 떠나기 전, 그러니까 '애송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이들에게나 어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 박인영·영화 칼럼니스트
# 이 영화는
■ 메인 테마 = 43회 아카데미 작곡상을 수상한 프란시스 레이의 메인 테마 
'Love Story'와 눈 덮인 센트럴 파크 장면서 울려 퍼지던 'Snow Frolic'은 알리 
맥그로우, 라이언 오닐과 함께 프란시스 레이라는 음악가의 이름을 관객들 뇌리에 
깊이 새겨 넣었다. "Where do I begin"으로 시작되던 앤디 윌리엄스의 노래까지, 
영화 '러브 스토리'는 '음악이 있어 완성되는' 멜로드라마의 정체성을 분명히 한다. 
20년 만에 뉴욕에 내린 폭설 에 즉흥적으로 찍을 수 있었다는 센트럴파크 장면과 
메인 테마는 어쩌면 정작 영화보다도 더 유명할 듯. 수없이 많이 언급되고 
패러디되면서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 선남선녀, 아름다운 배경, 
애절한 음악의 3박자를 갖추었다고 해도 이것과 함께 할 때만 멜로 영화의 만신전에 
오를 수 있음을 입증하는 명대사. 다툼 끝에 돌아와 사과하는 올리버에게 제니가, 
제니의 죽음을 알고 '미안하다' 말하는 아버지에게 올리버가 이야기한다. 영화를 
본 누구나 한 번쯤은 외워보았을 이 세기의 명대사는, 
그러나 "Love means not 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였던 대사를 잘못 
말한 것이었다고. 
■ 클리셰(!), 클리셰(?) = 상투적인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불온한 기운이 스며든 듯 스크린에는 구(舊)할리우드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혁신적인 스타일의 시도가 두드러진다. 그 때문에 기성세대에 대한 부정을 바탕으로 
한 둘 만의 결혼식 설정은 1967년작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졸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알리 맥그로우가 분한 제니 또한 21세기 어떤 여성보다도 더 명민하고 주체적이며 
관대한 품성의 소유자로 묘사된다. '뿔테 안경 쓴 똑똑한 여주인공' 
'불치병 걸린 순정녀' 혹은 '남자를 성장시키고 떠나는 여성'의 클리셰로만 폄하 
당하기에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의연한 대처가 인상적이다.
[중부매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