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하며]/생각하는글

[영화]원스 (2006)

Jackim 2008. 5. 25. 01:55


 원스 (2006)


가난한 연인들은 아파트 앞 계단의 차가움을 탓하지 않는다. 온 몸에 번지는 
냉기 속에서도 로맨틱한 연가(戀歌)는 태어난다. # 여자, 남자를 만나다
여자는 단 한 명의 청중이었다. 스산한 더블린의 밤거리, 노래 부르는 남자와, 
남자의 떠나간 여자만을 위한 외로운 노래. 아마도 주머니에 든 모든 것이었을 
2센트, 달랑 던져놓은 어린 여자는 이미 모든 걸 알아챈 눈치다. 
"그녀는 어디 있죠?…아직 사랑해요?…그녀를 잊지 않았군요."
진공청소기를 끌고 나타난 꽃 파는 여자(마르게타 이글로바)와, 실연당한 바보 
같은 청소기 수리공 남자(글렌 한사드)는 그렇게 만나 C코드로 시작되는 노래
('Falling Slowly')를 함께 부른다.
구멍 난 통기타와 겨우 1시간 빌려 두드리는 피아노가 만들어낸 화음은 기적 
같은 합일의 순간, 결코 잊히지 않을 한 때를 만든다.
물론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고, 가진 건 턱없이 부족하다. 아파트 앞 
차가운 계단에서의 대화, 얼마 안 남은 배터리 든 낡은 CD 플레이어, 아버지 몰래 
훔쳐 온 오토바이와 고작 반나절의 드라이브.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지나간 
시간들 앞에 고개 숙이는 대신, 살아갈 시간을 위해 다시 한 번 용기 내는 일. 
그걸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음악은, 혹은 사랑은.
▲ 가난한 연인들은 아파트 앞 계단의 차가움을 탓하지 않는다. 온 몸에 번지는 
냉기 속에서도 로맨틱한 연가(戀歌)는 태어난다. # 남자, 여자를 떠나다
"할 말이 있다면/바로 지금 말해줘"('Say It To Me')-남자의 절규는 아마 런던 
어디쯤에서 그의 전화를 기다릴 옛 연인을 향한 것이었다.
"진정 날 원한다면/내 맘을 알아줘요"('If You Want Me')-어둑한 가로등 불빛 
아래 여자가 나직이 읊조릴 때, 메시지 수신자도 어린 딸의 아버지인 체코 남자였다.
그렇게 지금 옆에 없는 과거의 사람들에게로 향하는 연가(戀歌)를 함께 부르고 
들으며, 지금 같이 있는 여자와 남자는 자꾸만 몸이 휘청거린다. 런던의 여자와 
더 많은 청중을 찾아 떠나야 하는 남자와, 체코서 남편을 불러들여야 하는 여자는 
너무도 간절하게 '불장난'을 하고 싶다. 이 여자와, 이 남자와 함께라면 새로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끝내 그러지 못할 남녀는 채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서로에게서 돌아선다.
그러니, 제대로 시작도 못한 채 피아노 한 대로 남은 그들의 이야기를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남편을 사랑하느냐는 남자의 서툰 체코어 물음 "밀루 에쉬 호?"에 
여자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로 "밀루유 떼베"라 말했었다. 그 고백이 제 때 
전달됐다 해도 아마 결말은 다르지 않았으리라. 원래 있던 자리, 자신들이 
돌아가야 할 자리로의 회귀.
이제 여자는 남자의 행선지를 모른다. 여자에게 편지 쓰겠다던 남자도 주소를 
제대로 적어왔을지 의문이지만, 무엇보다도, 둘은 서로의 이름도 묻지 않았었다. 
그저 어깨에 잠시 무거운 머리를 기댔던 순간, 마지막임을 모른 채 가벼운 굿바이 
키스로만 온기를 전한 순간이 있었을 뿐.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애틋한 어긋남과 막막한 돌아섬의 순간들에 '사랑'이란 
이름은 더 없이 어울리지 않는가.
그것이 있기 전과, 그 후가 이토록이나 달라지는 삶의 미묘한 기적 혹은 가슴 저린 
마술을, '사랑' 말고 달리 무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박인영·영화 칼럼니스트
# 이 영화는
■ 저예산디지털영화 "최소 예산으로"를 표방한 '원스'는 아일랜드 영화위원회의 
지원금 15만 달러를 들여, 디지털 카메라로 단 17일 동안 찍은 영화. 빈약한 
덩치에 거친 화면은 오히려 영화를 더 없이 사랑스럽고 매혹적으로 만들었다.
■ 음악 뮤지컬영화이기도 한 '원스'에서 음악은 극중 남녀 관계뿐만 아니라 
영화 제작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다.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활동 중인 4인조 인디밴드
 '더 프레임즈(The Frames)'를 1990년 결성, 보컬과 기타를 맡고 있는 글렌 한사드는
1991~93년 베이시스트로 활동했던 감독 존 카니(1972년생)의 제안으로 남주인공과 
음악을 맡았다. 게릴라식의 촬영 도중 '유명 가수' 글렌 한사드를 알아보는 팬들 
때문에 촬영이 중단되기도 했다고. 글렌 한사드의 솔로 앨범에 피아니스트로 참여했던 
체코 출신 음악인 마르게타 이글로바는 "If You Want Me"를 작곡하는 등 ost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결국 '원스'는 음악적 동지이기도 한 이들, 모두가 개입된 굉장히 
사적인 영화'가 됐다.
■ 사랑 '원스'의 남녀는 헤어졌지만 배우들은 인생의 동반자가 됐다. 영화 촬영 당시 
17살이었던 1988년생 마르게타 이글로바는, 13살 때 처음 만난 1970년생 글렌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남들은 18년 나이차를 뛰어넘은 연인이라 부르지만 그들 스스로는 
'우정'이라 부르는 관계.
[중부매일] 2008-03-14 2363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