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kim
2007. 11. 16. 14:00
여우가 심어주는 환상
|
|
[한겨레]2007-11-15 01판 M02면 1234자 |
로이 레이먼드라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부인에게 종종 속옷을 선물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뻥 뚫린 백화점에서 남자가 여자 속옷을 고르노라면 늘 뒤통수가 근질근질했다. 그래서 속옷 가게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손님들이 자유롭게 속옷을 구경할 수 있도록 백화점이 아닌 몰 형태의 쇼핑센터에 매장을 열었다. 동시에 카탈로그를 통해 속옷을 주문하는 우편주문 시스템도 시작했다. 결과는 대성공. 그로부터 30년 뒤, 이제 빅토리아 시크릿은 여자라면 누구나 입고 싶어 하는 속옷이자, 남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연인, 혹은 아내에게 입히고 싶어 하는 속옷이 되었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여우 같다. ‘속옷은 여성의 비밀스러운 부분이에요’라고 눈웃음을 치면서 그 비밀스러운 부분을 또 제가 먼저 대범하게 드러낸다. 그 대표적인 예가 패션쇼. 1년에 한번씩 열리는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의 주인공은 ‘빅토리아 시크릿 에인절스’로 지젤 번천, 캐롤리나 쿠르코바, 타이라 뱅크스, 하이디 클룸 같은 당대 최고의 모델들로 꾸린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최고의 모델이 아니면 ‘에인절’이 될 수 없지만 최고라고 해서 누구나 ‘에인절’이 될 수도 없다는 것. 남자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미의 기준-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 탄력 있는 피부 등-에 완벽하게 부합해야만 한다. 휜 다리에 납작한 가슴을 가진 케이트 모스나 널빤지 같은 몸매를 가진 요즘의 동유럽 모델들이 ‘에인절’이 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 이들은 빅토리아 시크릿의 패션쇼에서는 다른 곳에선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을 선보인다. 거대한 깃털로 몸을 장식하거나, 천사로 변신하거나, 스튜어디스로 변장하거나 …. 속옷차림으로 멋지게 무대를 누비는 그녀들을 보면서 남자들이 ‘저런 여자와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여자들은 ‘나도 저런 여자가 되고 싶다’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 그리고 거기에 빅토리아 시크릿의 성공 요인이 있다.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환상을 심어준다는 것.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여행 때 빅토리아 시크릿 속옷을 사오거나 인터넷을 통해 구입하는 여성들이 늘어남에 따라, 곧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될 것이라는 소문도 들려오지만 그 ‘곧’이 언제가 될지는 미지수. 다양한 디자인의 속옷을 독립된 매장에서 판매하는 것과 메일링 오더 시스템을 기본으로 하는 브랜드인 만큼 그 판매 형태를 우리나라 유통구조에 맞추어 어떻게 변형시키느냐가 수입 여부의 열쇠가 될 전망이다.
심정희/ 패션 에디터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