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말-우리에게 주소서 / 이어령
우리에게 주소서.
많은 것을 원하지 않나이다.
추위도 더위도 다 참고 견디겠나이다.
슬픈 일이 있어도 냉수를 마시듯 그렇게 마시겠나이다.
동상에 걸린 손가락이 근지러워질 때라도 잠자코 있겠나이다.
저녁에, 쓸쓸한 저녁에, 자기 발자국 소리만을 들으며
혼자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그런 시각의 외로움이라 해도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가끔 바둑을 두다가 지고 이기듯이 그런 것들은 곧 잊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잘 참고 잘 잊어버립니다.
당신의 은총이 내리지 않는다 해도 고난에 익숙한 우리들,
욕심을 부리어 당신 앞에서 보채지는 않겠나이다.
참으로 먼 곳에 계신 당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당신......
그러나 이것만은 우리에게 주소서.
때때로 저 순결한 흰 눈송이를 내려 주듯이,
때묻지 않은 순결의 言語를 내려 주소서.
태아가 이 세상에서 맨처음 배운 그런 말로
우리들의 꿈을 말하게 하소서.
지금 내리는 저 눈송이처럼 하얗고 하얀 그 言語로
당신에게 기도를 드리게 하시고,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말할 수 있게 하소서.
수다스러운 地上의 言語가 아니라,
지적도처럼 등기된 그런 言語가 아니라,
잔칫집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의미가 없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그런 言語가 아니라,
은행 창구에서 돈을 헤며 이야기하는 그런 言語가 아니라,
앵무새 같은 言語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소서.
상처를 덮고, 오물을 덮고,
내 논과 네 논의 사이를 갈라놓는 논두렁길을 덮고,
파랗고 까만, 색깔이 서로 다른 지붕을 덮고,
천지 창조의 첫날처럼 땅이 굳기 이전의 그런 世界로 돌아가게 하는
눈송이 같은 言語를 주옵소서.
그러나 녹지 않게 하옵소서.
눈은 순수하나 흙 묻은 발에 밟히면 곧 때묻고 맙니다.
아침처럼 그렇게 찬란하지 않습니다.
밤 사이에, 우리가 철없이 잠든 그 틈에,
기적처럼 하얗고 하얀 순결의 言語를 내려 주옵소서.
정월입니다.
설날처럼 새로운 그 言語를 내려 주시기만 한다면 괜찮습니다.
슬픔도 찬물처럼 마시며 지내겠나이다.
- 이어령 에세이 『말』(문학세계사, 1990) -